사마의(사마중달)에게서 배울 점.
만화책 용랑전에 의해 내 기억속에서 많이 왜곡되버린 사마의.
하지만 중드 신삼국(2010)을 보며 사마의에 대해 새롭게 알게되었다.
일단 사마의의 재능은 재갈량에 못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재갈량과는 달리 나이를 먹도록 그렇다할 활약을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의심많은 집안인 조조-조비-조예를 보좌하며 계속 견제를 당하기 때문.
인재를 잘 보는 조조의 눈에 띄어 조충의 가정교사로 채용되지만, 조충이 암살되며 새로운 태자를 선택해야할 기로에서, 어명을 거스르며 3년간 상을 치르겠다는 핑계로 앞으로 모실 태자를 선택하는 신중함을 보인다.
조비가 사마의를 책사로 뒀을 때에도 사마의에게 병권을 주지 않음으로써 실질적인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그닥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참는다.
또 조비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시켜놓지 않고 갑자기 죽는 바람에 사마의의 재능을 시기하는 간신들에 의해 태자인 조예가 사마의를 전적으로 신임하지 않게 된다. 제갈량이 북벌을 감행할 때 기산으로 기습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이를 막기위해 황제의 허락없이 무단으로 징병을 하다가 자칫하면 재갈량의 반간계+간신들의 모략에 의해 멸족당할 뻔하기도 한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지만 수십년간 쌓아올린 공을 잃고 관직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결국 사마의의 예측대로 제갈량이 기산으로 침략하여 위나라가 망할 위기에 놓이자, 조예는 사마의를 다시 대도독(국방부장관)에 등용하게된다.
이렇듯, 사마의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도 주인을 잘못만나 고생을 좀 하게 되는데, 여기서 사마의의 대단한 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인내할 줄안다는 점. 자신의 나설때와 물러날 때를 정확히 알고, 기회가 올때까지 참고 기다린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보통의 소인배라면 어땠을까?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다른 주인을 찾아갔거나, 쪼끔 안다고 함부로 나대다가 시기하는 자들에게 암살을 당하거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성급한 선택을 하여 좌천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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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드 신삼국(2010)을 재밌게 보고있다.
유비가 삼고초려까지 하며 제갈공명을 처음 모시고 왔을 때, 관우와 장비가 계속 못마땅하게 여기며 비꼬는 장면이 나온다. 점잖은 관우까지도 장비의 비꼼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치는 모습이 의외였다. 무관인 관우와 장비 입장에서는 목숨 걸고 전장에서 나가 싸우는 자신들보다, 입만 놀려대며 유비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제갈공명이 미웠을 터이다. 그래서 제갈공명을 ‘부유(썩은두부)’, ‘물’이라고 놀려대며 비아냥거린다. 나중에 하우돈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제갈공명의 놀라운 지략으로 대승을 거두기 전까진 말이다.
아무튼,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를 가나 문관과 무관의 갈등 구조가 있구나!’
내가 군대에 있을 때의 경험에 비춰보자면, 나는 화학병 출신으로써, 내 보직은 행정병이었고, 옆방엔 주로 몸을 쓰는 병(이하 노역병이라 해두자)들이 있었다. 같은 부대 소속이지만, 일의 성격이 달랐던 것이다. 조그마한 부대 안에서 조차 항상 행정병과 노역병은 갈등이 있었다. 노역병은 항상 행정병을 개땡보라고 비아냥 거렸고, 행정병 또한 노역병이 자신들의 고충을 생각지도 않고 그런 태도로 일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좀 더 넓게 보자면, 육군과 공군의 갈등에서도 드러난다. 육군은 무작정 공군을 개땡보라고욕하며, 그것도 군대냐고 비아냥거린다. 공군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고충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욕만하는 그런 육군들을 멸시한다.
이런 갈등 양상은 사회 곳곳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부사관과 사관의 갈등.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의 갈등. 조선시대 문관과 무관의 갈등, 패미니스트 집단과 남자집단의 갈등 ... 열거하자면 수 없이 많다.
이런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아마 가장 큰 원인은 상대적인 위화감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라, 상대방의 고충은 잘 보지 못하고, 자기보다 나은 상황은 잘 보게된다. 그래서 자신이 고통을 느끼고 있는데, 남들이 편한 모습을 지켜볼 수 없다. 만약 어쩔 수 없이 고생을 해야 한다면, 남들도 똑같은 고생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본능이다. 그래서 공동 작업을 할 때, 혼자서 뺑끼치는 모습은 그 죄가 더욱 커진다.
주로 몸을 쓰는 직종인 무관, 기술자, 노역병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편해보이는 문관, 엔지니어, 행정병이 눈에 거슬리기 마련이고, 고생한 것에 비해 자신들의 대우가 더 낫지 않다면 불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회 구조상 머리를 쓰는 쪽이 몸을 쓰는 쪽 보다 대우가 좋으므로 이런 갈등양상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갈등양상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 보면 문관이면서도 무관의 신임을 얻고, 엔지니어이면서 기술자들의 존경을 받으며, 행정병이면서도 노역병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었다.
내가 생각하는 해법을 두 가지로 정리를 해보자면,
첫째로는 제갈공명처럼, 정말 무관들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엔지니어로써 기술자들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전공지식이다. 너무 복잡해보여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석호필같은 엔지니어가 전공지식을 동원하여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내면 그제서야 기술자들은 엔지니어에게 복종한다.
두 번째로는 문관이면서도 무관과 똑같이 고생을 하는 것이다. 아까 언급한, 행정병이면서도 노역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케이스를 보면, 그놈은 시키지 않아도 작업이 있을 때 제일 먼저 나서서 노역병들을 도와주었다. 엔지니어와 기술자의 사이에서도, 사무실에 쳐박혀 있는 엔지니어보다, 직접 현장에서 기술자들과 땀흘리며 같이 일하는 엔지니어에게 더 복종하기 마련이다.
나는 살아오며 문관의 입장에 있던 적이 많았으므로, 무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멸시를 느껴왔다. 앞으로 내가 엔지니어가 되어 산업현장에 나가면 나이 지긋하진 기술자분들을 통솔해야 할 것이다. 오늘 내가 깨달은 해법을 잘 숙지하며 열심히 실력을 쌓고, 같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이면 엔지니어로써 대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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